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(문단 편집) === [[천명제|누르하치]]의 대두 ===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%E6%B8%85_%E4%BD%9A%E5%90%8D_%E3%80%8A%E6%B8%85%E5%A4%AA%E7%A5%96%E5%A4%A9%E5%91%BD%E7%9A%87%E5%B8%9D%E6%9C%9D%E6%9C%8D%E5%83%8F%E3%80%8B.jpg|width=100%]] || || '''누르하치''' || 이성량은 여진인 왕고를 물리쳤는데, 왕고의 양아들이었던 아타이(阿臺, ? ~ 1583)는 친명파인 하다부에서 아버지를 팔아넘겼다고 여기며 하다부와 대립하던 반명파 예허부와 손을 잡고 군대를 계속 동원했다. 이에 이성량은 하다부를 도와 아타이를 공격하게 된다. 이 과정에서 누르하치의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도 휘말리고 말았다. [[아이신기오로 기오창가]](覺昌安, [[1526년]] ~ [[1571년]])는 누르하치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고, 기오창가의 손녀딸[* 즉 누르하치의 사촌 누이]이 다름아닌 아타이의 아내였던 것이다. 기오창가와 누르하치의 아버지였던 [[아이신기오로 탁시]]는 이 아타이의 반란에서 명나라의 편을 들어 참전했는데, 기오창가는 손녀를 구하기 위해 아타이가 있는 성에 들어섰지만 아타이가 아내를 내어주지 않아 억류당했고, 탁시 역시 따라 들어갔다가 억류당했다. 그 직후 이성량이 화공을 구사해서 아타이를 죽였으나, 친명파였던 기오창가와 탁시 역시 불에 타 죽었다. 이에 관한 다른 이야기로는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타이에게 항복을 권유하러 들어갔다가 붙들렸고, 기오창가는 불에 타 죽었으며 탁시는 난입해 온 명군이 오인하여 죽여버렸다고 한다. 이때가 [[1583년]]의 일이었다.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개죽음을 당했다. 누르하치는 비범하게도 이성량이 자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게 된다. 이를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, 도덕적으로 보면 이성량은 25세의 장성한 청년 누르하치에게 큰 빚을 진 셈은 맞았다. 누르하치는 이성량과 아주 잘 맞는 청년이었다. 어리고, 똑똑했으며,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쨌든 명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. 이성량은 결과적으로 누르하치에게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과의 보상으로 30통의 칙서와 30필의 말을 내주었다. [[청나라]] [[천명제|태조]]의 첫 번째 군자금은, [[아버지]]와 [[할아버지]]의 목숨 값이었던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